남성불임 치료의 기준이 달라지고 있다. 정자 수를 늘리거나 운동성을 개선하는 데 집중하던 기존 접근에서 벗어나 실제 임신과 출산 가능성, 치료에 걸리는 시간, 부부가 감당해야 할 신체적·경제적 부담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국내 전문가들의 진료 권고안이 발표됐다.

대한남성과학회(KSSMA) 진료지침위원회는 국제학술지 '세계남성건강학회지(World Journal of Men's Health)' 2026년 10월호에 한국 의료환경에 맞춘 남성불임 치료 권고안을 발표했다. 논문은 지난 7월 23일 온라인으로 먼저 공개됐다.

이번 권고안은 정계정맥류, 남성호르몬 이상, 폐쇄성·비폐쇄성 무정자증, 수술적 정자 채취, 시험관아기(IVF), 난자세포질내정자주입술(ICSI·미세수정) 등 남성불임 치료 전반을 다뤘다.

특히 남성의 정액검사 결과만으로 치료 방향을 결정하지 않고 여성의 나이와 난소기능, 부부의 임신 계획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정자 수 늘었다고 치료 성공일까…평가 기준은 '출산'

 

남성불임 치료에서는 정자 농도와 운동성, 정상 형태 정자 비율 등이 중요한 평가 지표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가 개선됐다고 반드시 임신이나 출산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학회는 치료 효과를 판단할 때 정액검사 수치뿐 아니라 실제 임신과 생아출산 가능성, 임신까지 걸리는 시간, 치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담 등을 함께 고려하도록 권고했다.

이는 남성불임 치료의 목표가 단순히 검사 수치를 정상 범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임신과 출산에 도달하도록 돕는 데 있다는 의미다.

 

정계정맥류 수술, 모든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정계정맥류는 고환 주변 정맥이 비정상적으로 확장되는 질환으로 남성불임의 대표적인 교정 가능한 원인 중 하나다. 그러나 정계정맥류가 발견됐다고 모든 남성에게 수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학회는 정계정맥류의 임상적 특성과 정액검사 이상 여부, 부부의 난임 상황 등을 종합해 수술 필요성을 판단하도록 했다. 수술로 정액검사 수치가 개선될 가능성이 있더라도 실제 임신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수술 후 효과를 기다릴 시간이 충분한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특히 여성의 나이가 많거나 난소기능이 저하된 부부라면 남성의 수술 결과만 기다리다가 적절한 난임 치료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무정자증도 원인에 따라 치료법 달라진다

 

정액에서 정자가 확인되지 않는 무정자증은 크게 폐쇄성과 비폐쇄성으로 구분된다. 폐쇄성 무정자증은 정자가 만들어지지만 이동 통로가 막혀 정액으로 배출되지 않는 상태다. 반면 비폐쇄성 무정자증은 고환 자체의 정자 생성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경우다.

폐쇄성 무정자증에서는 막힌 정자의 이동 통로를 복원하는 미세수술과 고환 또는 부고환에서 정자를 직접 채취하는 방법을 비교해야 한다. 여성의 생식능력과 부부의 치료 계획에 따라 적절한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비폐쇄성 무정자증에서는 정자 생성 장애의 원인과 호르몬 상태 등을 평가하고 수술적 정자 채취 가능성을 검토한다. 특히 고환 조직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면서 정자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은 부위를 찾는 미세수술적 고환정자채취술(micro-TESE)이 주요 치료 선택지로 고려된다.

학회는 정자 채취 수술을 계획할 때 시험관아기 일정과 정자 동결보존 여부를 미리 논의해 불필요한 반복 시술과 시간적 부담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남성호르몬 치료도 원인 확인이 우선

 

남성호르몬 이상이 동반된 난임 환자에게 약물치료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모든 남성불임 환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호르몬 이상 유형과 정자 생성 장애의 원인을 확인한 뒤 적절한 환자에게 치료를 시행하고 효과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임신을 계획하는 남성에게 테스토스테론을 외부에서 직접 투여하면 오히려 정자 생성이 억제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원인을 확인하지 않은 채 약물을 장기간 사용하는 것보다 치료 목표와 평가 시점을 명확히 설정하는 접근이 중요하다.

 

IVF 미세수정, 무조건 선택할 필요 없다

 

이번 권고안에서 주목할 부분은 미세수정(ICSI)의 선택 기준이다. 미세수정은 정자 한 개를 난자 안에 직접 주입해 수정시키는 기술로 정자 수가 매우 적거나 운동성이 심하게 저하된 경우, 이전 수정 실패가 있었던 경우 등에 활용된다.

그러나 심한 남성 요인이 없는 부부에게 미세수정을 일률적으로 시행한다고 해서 일반적인 시험관아기 수정 방식보다 생아출산율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연구 결과가 축적되고 있다.

따라서 심한 남성불임, 과거 수정 실패, 수술로 채취한 정자를 사용하는 경우 등 의학적 필요성을 중심으로 미세수정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공수정(IUI) 역시 정자의 수와 운동성뿐 아니라 여성의 나이와 난소예비력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정액 상태가 심하게 나쁘거나 인공수정에 반복적으로 실패한 경우에는 시험관아기 또는 미세수정으로 전환하는 것이 효율적일 수 있다.

 

남성 치료 기다리다 여성의 임신 시기 놓쳐서는 안 돼

 

학회가 강조한 또 하나의 원칙은 ‘시간’이다. 남성의 정자 생성 기능을 개선하려면 일정한 치료 기간이 필요하지만 여성의 나이와 난소기능에 따라 임신 가능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남성에게 교정 가능한 문제가 발견되더라도 여성의 생식능력을 함께 평가해 치료 순서를 결정해야 한다. 남성 치료와 시험관아기 준비를 병행하거나 임신까지 남은 시간이 제한적이라면 보조생식술을 우선 고려하는 접근도 가능하다.

결국 남성과 여성을 별도로 치료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부부의 생식능력을 하나의 치료 계획 안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의미다.

 

한국 의료환경 반영한 권고안…남성불임 진료의 새로운 기준

 

이번 권고안은 기존 국제 진료지침과 주요 연구 결과를 검토하고 국내 의료환경을 고려해 마련됐다. 남성불임의 원인별 치료법을 제시하는 동시에 실제 출산 가능성과 치료 부담을 함께 평가하도록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새로운 치료법의 효과를 직접 검증한 임상시험이 아니라 기존 연구와 전문가 합의를 종합한 진료 권고안이다. 권고안 발표만으로 국내 모든 의료기관의 진료 방식이나 건강보험 적용 기준이 즉시 변경되는 것은 아니다.

남성불임 치료의 궁극적인 목표는 정액검사 결과를 개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부부가 불필요한 치료와 시간 낭비를 줄이고 실제 출산에 도달할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이번 한국형 진료 권고안은 남성불임을 단순한 정자 이상이 아니라 부부의 임신 가능성과 삶의 질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 의학적 문제로 접근하는 새로운 진료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 대한남성과학회(KSSMA) 진료지침위원회 연구진이 국제학술지 ‘세계남성건강학회지(World Journal of Men's Health)’ 2026년 10월호에 발표한 남성불임 진료 권고안(2026년 7월 23일 온라인 선공개)을 토대로 작성했습니다. DOI: 10.5534/wjmh.260149, PMID: 425334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