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은행(sperm bank)은 정자를 채취해 동결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내주는 기관이다. 처음 정자은행이 만들어진 것은 1964년에 미국 아이오와주와 일본 도쿄다. 불임 혹은 난임 부부가 그리 많지 않았던 1960년대에 정자은행이 왜 필요했을까. 항암치료나 방사선 치료 같은 정자 생산을 저해하는 치료를 앞둔 남성을 위해, 혹시 모를 참전을 대비하는 남자 군인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언 60년이 지난 지금, 정자은행의 소비자는 일반 대중으로 확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성불임(비폐쇄성 무정자증) 부부에서부터 항암치료자, 동성 부부의 비배우자 시험관아기 시술(IVF) 등에 이르기까지 정자은행 이용자가 대폭 늘어나고 있다. 해외에서는 정자은행 운영을 정부와 민간이 협력하여 발 벗고 나서고 있고, 정자동결보존을 돕는 시민연대까지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에는 상업적 정자은행이 약 650개에 달한다. 1980년에는 노벨상 수상자 전용 정자은행으로 불리는 고지능 정자은행까지 설립돼 지금껏 운영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지난 30년간 정자은행을 통해 매년 3만 명씩 약 100만 명의 출산이 이뤄졌을 정도로 이용 빈도가 높다.

유럽은 정자은행을 상업적 용도보다 국가 차원의 공공기관 성격으로 운영한다. 프랑스는 중앙정자은행(Centre d'Etude et de Conservation du Sperme)과 함께 지역 거점 대학병원 28곳에 정자은행을 두고 있다. 영국은 도시마다 자리한 국민건강보험 불임센터 안에 정자은행이 일반 은행처럼 간판을 내걸고 있다. 중국은 17개 성(省)의 거점 병원에 정자은행과 체외수정센터가 마련돼 있다. 일본은 비영리단체를 포함해 민간에서 운영하는 15곳의 정자은행이 있다.

한국은 어떤가. 세계의 흐름에 발 빠르게 따라가는 우리나라가 유독 이 분야는 넋 놓고 무시하고 있다. 우리나라 남성은 정자를 기증하는 것도, 기증받는 것도 꺼린다. 더 정확히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 정자은행 운영형태는 국가, 공공 혹은 상업으로 나누어지는데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유일하게 상업적(영리) 정자은행 시스템이 없는 나라다. 그나마 설립된 공공(비영리) 정자은행도 3년째 기증 정자가 없어 간판을 내려야 할 위기에 처했다.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뿐 아니라 미국·캐나다·독일·일본·대만 등 상당수 나라에서 정자기증을 통한 출생을 관련 법과 행정기관을 통해 합법화하고 있는 분위기를 떠올리면 한국은 너무나도 구시대적 사고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한국인이 정자 기증과 공여를 극히 꺼리는 이유에 대해 일부분 이해가 되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혈통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서다. 아무리 정자 기증자의 신원을 익명으로 한다고 해도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가정용 유전자(DNA) 검사 키트가 인터넷에서 판매가 되고 있는 세상이다보니 자신의 정자에서 비롯돼 세상 빛을 본 생명체가 언젠가는 생물학적 아버지(biological father)를 찾아 나설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또 생판 모르는 타인의 유전자(정자)에 대한 거부감도 무시할 수 없다.

 

문중(門中)만의 정자은행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다.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고 법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정자은행의 표준 운영 지침이 상이할 수밖에 없다. 우리 정서에 맞게 효율적으로 설립하고 운영하면 된다. 만약 정자 기증이나 공여가 한민족만이 알 수 있는 성씨(姓氏)·문중(門中)별로 이뤄진다면 어떨까. 성(姓)과 본(本)을 구분해서 각각 따로 동결보존을 해 놓는 것이다. 성씨·문중별 정자 동결보존 방법은 어쩌면 한국적 문화와 정신세계에 가장 부합하는 운영체계가 아닐까 싶다.

최근 국내 몇몇 종가(宗家)의 종주(宗主)가 주축이 돼 비혼 혹은 출산을 기피하는 후손을 걱정하며 해결 방안을 찾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문중 전체에서 똑똑하고 건강한 후손(남성)을 찾아내 정자를 보관(익명)해 놓았다가 남성 불임으로 인한 난임을 겪는 후손(부부)에게 공여해 주고 싶다”는 것. 그는 지역 난임 병원에 이른바 ‘문중(門中)만의 정자 동결보존’이 가능한지 문의했다고 한다.

또 어떤 종가의 종주는 “늦어도 너무 늦게 결혼을 하는 후손(男)들을 걱정하며 암 발병, 각종 질환 등으로 인해 남성 불임(난임)이 될지 모르니 한 살 이라도 젊을 때 정자를 동결보관을 했다가 만약 결혼하지 않는다면 문중 내 난임 부부(남성 불임)에게 공여를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이른바 문중(門中)만의 정자은행인 셈이다.

한국의 종가(宗家)는 특정 가문의 중시조(中始祖)로부터 적장자로 계승돼 온 집을 말한다. 부계 혈통 계승을 원칙으로 하다 보니 증조부, 조부, 아버지, 아들에게로만 유전되는 Y염색체에 대한 자부심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공공 정자은행 혹은 난임 치료 전문병원이 문중별 정자 동결보관을 위해 노력해 줄 수 있느냐에 있다. 우리나라도 서구처럼 정자은행만 관리하는 정부기관이 생겨야 할 것 같다. 미국은 식품의약국(FDA)이 설립한 HCT/Ps(Human Cell and Tissue or Cell and Tissue Bank Product)에서, 영국은 인간생식배아관리국(Human Fertilisation and Embryology Authority)에서 정자은행을 규제하고 관리한다.

글로벌 시대에 한국의 성씨의 유래니, 1900년대의 호적제도와 민적법을 들먹이며 성씨별 Y염색체의 고유성을 운운하면 꼰대의 조상님 취급을 받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라도 건강한 정자 기증이 늘어난다면 좋은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상상해 보자. 예를 들어 무정자증(비폐쇄성)으로 정자를 공여받아야 하는 남성의 성본이 한양 조씨라면 비배우자의 정자 공여 시 이왕이면 한양 조씨 문중에서 기증된 정자가 훨씬 믿음직하지 않을까. 이렇게 되려면 종가마다 종주들이 자발적으로 ‘자자손손 자손만대 캠페인’의 위원장이 돼 발품을 팔아야 할 것이다. 문중 내 건강하고 똑똑한 인재가 얼마나 많겠는가. 뜬구름 잡기가 아니라 훨씬 가능성이 높은, 댐 건설 같은 프로젝트가 아닐 수 없다.

 

꼭 필요하고 시급한 정자은행

 

1980년대였다. 전남 구례에서 한 중년 여성이 대학병원 외래에서 산부인과 교수에게 허리 굽혀 여러 번 감사의 뜻을 표하는 걸 봤다. 국내에 ‘냉동정자’라는 것이 없던 시절 남편이 무정자증인 이 여성은 서울까지 올라와 배란 시기에 익명의 의과대학생이 제공한 신선 정자로 임신이 됐다. 그렇게 낳은 아들이 초등학생이 될 무렵 그는 이렇게 자랑했다. “우리 마을처럼 산골에 이렇게 귀티 나고 잘생긴 애는 보덜 못했지라우. 매일 쇠죽을 끓이면서 또 한 번 애를 바라본당께.” 당시 40대 중반의 촌부를 보면서 ‘양질의 정자는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 시절(1980년대)에는 국내에 정액을 냉동시키는 기술이 부진해 인공수정을 할 경우 배란 예상일에 신선 정액을 질강 내에 넣어주는 질강 내 인공수정을 시행했다. 요즘이야 정액 전체를 냉동이 가능하고 에이즈과 같은 감염력 없음을 확인하는데 그치지 않고 6개월 지나서 재확인해서 제공받지만 그 시절에는 남편과 같은 혈액형인 정자를 공여받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요즘은 남편과 혈액형이 맞는 정자 구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의 종가들이 종가 내에서 필요한 정자를 냉동해 종친이 필요하면 쓸 수 있게 하자는 발상은 너무나도 기발해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문중이 특별 관리하는 정자는 종가 내 종친만 해동해서 쓸 수 있겠지만, 이 같은 분위기가 일파만파 확산된다면 한국인만의 종자(정자) 보존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정자 냉동이나 정자은행 발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것이다.

일반인이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은 꽁꽁 언 정자를 몇 년 혹은 몇십 년 후 해동했을 때 문제가 없는지, 임신에 성공해 건강한 아기가 태어날 수 있는지다. 걱정할 필요 없다. 믿기지 않겠지만 정자 동결보존의 역사가 200년이 넘었다. 이탈리아의 생물학자 라차로 스팔란차니가 눈 속에서 인간 정자의 생존을 관찰한 때가 1776년이었다. 이때부터 정자에 대한 저온효과와 동결보존에 관련된 연구를 시작했다. 1953년에 인간 동결정자를 이용한 세계 최초 임신을 시작으로 지난 48년간 IVF(시험관아기 시술)로 태어난 아기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떠올리면 의미 없는 걱정이 될 것이다.

IVF를 하기 위해 채취된 정자는 동결보존액과 혼합하여 동결용 용기에 넣고 영하 196℃ 액체질소 탱크 속에 동결시켜 보관한다. 냉동생물학의 발전을 토대로 세포손상을 극소화할 수 있는 동결보존제와 유리화 동결법(vitrification)과 같은 기술로 해동 정자의 회복력이 높아졌다.

정액을 냉동할 때 보조제로 글리세롤과 달걀노른자를 사용한다. 이 두 가지는 정자 내에서 물을 빼내는 역할을 하며 마치 식물의 씨앗처럼 정자가 고체 상태로 –196℃에서 보존되도록 한다. 그렇다면 정자가 냉동되었다가 해동이 되어도 괜찮을까. 동결보존된 정자는 해동할 때 약 40%가 원상회복한다. 정자 내로 물이 들어가 채워지면서 냉동 보조제가 제거되고 정자의 운동성이 되살아난다.

달걀노른자는 현재 난자나 수정란의 냉동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정자 냉동에만 사용한다. 조류독감 감염 가능성으로 대체 보조제가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달걀노른자만큼 높은 회복률을 보이는 것은 없다.

요즘 IVF에 사용되는 정자는 ICSI(난자 내 직접 주입술)라는 수정 방법 덕에 여러 위험 요인이 감소됐다. 해동된 정자가 수정 전에 장시간 배양되면 정액 내 프리 라디칼(free radical)이라는 독성물질이 생겨 정자 DNA에 타격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체외수정술에서 ICSI라는 수정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독성물질의 노출을 줄이고 수정률도 높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국내에서도 서서히 정자 냉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비혼자와 결혼이 늦어지면서 가임력 저하는 물론이고 자칫 암 등의 질환으로 인해 가임력 상실이 될 수가 있다는 만약을 대비하는 것이다.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난자 수가 정해져 있고, 배란이 되는 난자가 한정적이지만, 남성은 일생동안 주기적으로 정자가 생산된다고 자신하듯 믿어서는 안 된다. 남성도 마흔이 넘으면 정자 수와 퀄리티, 운동성 등이 급격하게 저하될 수밖에 없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매년 남성 난임환자가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남성쪽 문제로 난임일 경우 무정자증, 혹은 희소정자증이 원인인 경우가 78.5%로 가장 많고, 음낭정맥류 14.2%, 고환 및 음낭의 기타선천기형 4.7% 등으로 집계되고 있다. 통계상 한해 600~700여쌍이 비폐쇄성 무정자증으로 인해 비배우자 정자공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비단 IT기술만이 아니다. 인류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은 ‘태어남(출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자와 난자를 채취해 인위적으로 체외 수정시켜 임신(출산)을 이뤄낸 로버트 에드워드 박사(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에게 노벨재단이 노벨 의학상을 수여한 이유도 태어남에 기여해서일 것이다. 정자 기증과 공여를 놓고 ‘옳다’ ‘그르다’, ‘틀리다’ ‘맞다’는 논쟁을 벌이는 일은 무의미하다. 이제는 ‘꼭 필요하고 시급한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