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임약을 오래 복용하면 난소가 쉬면서 난자도 보존될까.
피임약을 복용하면 난소가 쉬게 되는 이유는 배란을 유도하는 호르몬의 분비가 억제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월경주기에서는 뇌하수체에서 난포자극호르몬(FSH)과 황체형성호르몬(LH)이 분비돼 난소 속 난포를 성장시키고 배란을 유도한다.
그러나 복합경구피임약에 포함된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틴은 뇌에 호르몬이 충분하다는 신호를 보내 FSH와 LH의 분비를 억제한다. 이로 인해 난포의 성장이 제한되고 배란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흔히 이를 ‘난소가 쉰다’고 표현한다.
다만 난소가 완전히 활동을 멈추는 것은 아니다. 배란이 억제되는 동안에도 난소 안에서는 난포의 자연적인 소실이 계속된다. 따라서 피임약을 복용해 배란을 막는다고 해서 난자가 소모되지 않거나 난소의 노화가 멈추는 것은 아니다.
경구피임약은 배란을 억제하지만 난소의 노화까지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 반면 장기간 복용했다고 해서 난소 기능이 영구적으로 저하되거나 임신 능력이 떨어진다는 근거도 부족하다.
특히 피임약 복용 중 낮게 측정된 난소예비력 수치가 약물 중단 이후 회복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주목된다. 난소 기능을 평가할 때 피임약 복용 여부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다.
피임약 8년 복용, 중단 후 AMH 53% 증가
2020년 국제학술지 '생식생물의학 온라인'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복합경구피임약을 장기간 복용한 여성 68명의 난소예비력 변화를 추적했다. 참가자의 평균 연령은 29.4세, 평균 복용 기간은 약 8년이었다.
연구 결과 난소예비력을 나타내는 항뮬러관호르몬(AMH)의 중앙값은 피임약 복용 중 13pmol/L에서 중단 3개월 후 22.5pmol/L로 증가했다. 연구진이 보고한 평균 증가율은 53%였다.
초음파로 확인하는 동난포수(AFC)도 평균 41% 증가했다. 두 지표는 대체로 피임약 중단 후 2개월 이내에 안정화됐다.
이는 피임약이 난소예비력 검사 수치를 일시적으로 낮출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만 AMH가 증가했다고 해서 새로운 난자가 만들어지거나 이미 소실된 난자가 회복됐다는 뜻은 아니다.
난소는 쉬어도 난자 노화는 멈추지 않아
피임약이 난소를 쉬게 한다는 표현은 배란 억제 작용에서 비롯됐다.
복합경구피임약은 난포자극호르몬(FSH)과 황체형성호르몬(LH)의 분비를 억제해 난포 성장과 배란을 막는다. 그러나 난소 안에 존재하는 난포의 자연적인 소실까지 중단시키지는 못한다.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한정된 수의 난포를 가지고 있으며, 이 가운데 대부분은 배란되지 않고 자연적으로 소멸한다. 이러한 과정은 피임약을 복용하는 동안에도 계속된다.
따라서 피임약을 5년이나 10년 복용했다고 해서 그 기간만큼 난자가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나이가 증가하면서 나타나는 난자 염색체 이상 위험 역시 피임약으로 예방할 수 있다는 근거는 없다.
피임약 장기복용, 임신 성공률 떨어뜨릴까
2018년 국제학술지 'Contraception and Reproductive Medicine'에 발표된 메타분석에서는 22개 연구에 참여한 여성 1만4884명의 피임 중단 후 임신 결과를 분석했다.
그 결과 피임을 중단한 여성의 평균 83.1%가 12개월 이내에 임신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경구피임약 사용 기간이 피임 중단 이후의 임신 능력에 장기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근거를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83.1%는 경구피임약뿐 아니라 다양한 피임 방법을 사용한 여성을 종합한 수치다. 피임약 장기복용 여성만의 임신율이나 시험관아기 시술 성공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피임약 중단 직후 일부 여성에게 배란 회복이 지연될 수 있지만, 이러한 일시적인 변화가 영구적인 난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피임약 오래 먹으면 폐경도 늦어질까
피임약 복용이 폐경 시기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본 연구도 있다.
2001년 발표된 네덜란드 DOM 코호트 연구에서는 자연폐경 여성 4589명을 대상으로 경구피임약 사용과 폐경 연령의 관계를 분석했다.
연구 결과 저용량 경구피임약 사용이 조기 폐경 위험을 유의하게 높인다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피임약이 난포 소모를 막아 폐경을 늦춘다는 사실도 입증되지 않았다.
배란을 억제하는 것과 난소의 생식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라는 의미다.
난소기능저하 진단 전 피임약 복용 여부 확인해야
이번 연구 결과는 난임을 준비하는 여성의 난소예비력 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AMH는 난소에 남아 있는 난포의 양을 간접적으로 평가하는 지표지만, 피임약 복용 중에는 실제보다 낮게 측정될 수 있다. 따라서 낮은 AMH 수치만으로 난소기능저하나 조기난소부전을 단정해서는 안 된다.
의료진은 여성의 나이와 월경 양상, 초음파 검사 결과, 호르몬 수치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필요한 경우 피임약 중단 후 재검사를 고려할 수 있다.
다만 AMH 수치가 정상이라고 해서 난자의 질이나 임신 성공 가능성까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AMH는 주로 난소의 양적 예비력을 반영하며 난자의 염색체 정상 여부를 직접 보여주지는 않는다.
결국 피임약은 배란을 억제하는 약물이지 난자의 노화를 막는 약물은 아니다. 장기간 복용이 영구적인 난임을 유발한다는 근거는 부족하지만, 난자를 보존하거나 생식 수명을 연장한다는 효과 역시 입증되지 않았다.
임신을 계획한다면 피임약 복용 기간 자체보다 현재의 연령과 난소 기능, 기저 생식기 질환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 덴마크 코펜하겐대학교병원 셀마 클뢰베 란데르쇠(Selma Kloeve Landersoe) 연구진이 2020년 국제학술지 '생식생물의학 온라인(Reproductive BioMedicine Online)'에 발표한 ‘복합경구피임약 장기 사용 중단 후 난소예비력 지표(Ovarian reserve markers after discontinuing long-term use of combined oral contraceptives, DOI: 10.1016/j.rbmo.2019.10.004, PMID: 31831368)’와 타델레 기룸(Tadele Girum)·아베바우 와시에(Abebaw Wasie) 연구진이 2018년 ‘피임 및 생식의학(Contraception and Reproductive Medicine)'에 발표한 '피임 중단 후 생식능력 회복: 체계적 문헌고찰 및 메타분석(Return of fertility after discontinuation of contraception: a systematic review and meta-analysis, DOI: 10.1186/s40834-018-0064-y, PMID: 30062044)’ 등을 토대로 작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