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 수가 적고 운동성이 떨어지는 데다 형태까지 비정상적인 남성불임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유전적 단서가 발견됐다. 정자의 여러 기능에 동시에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을 유전자와 단백질 수준에서 규명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중국 쓰촨대학교 연구진은 남성불임 환자 3명에게서 WFS1 유전자의 양쪽 대립유전자에 병적 변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 유전자의 기능 이상이 정자 형성과 수정 능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연구는 2026년 10월 4일 국제학술지 ‘어드밴스드 사이언스(Advanced Science)’에 발표됐다.
정자 수·운동성·형태가 동시에 나빠지는 이유
남성불임을 진단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확인하는 지표는 정자의 수와 운동성, 형태다. 정자 수가 부족하거나 움직임이 느리고 정상적인 형태의 정자가 적으면 자연임신 가능성이 낮아질 수 있다.
특히 세 가지 이상이 동시에 나타나는 상태를 ‘희소·무력·기형정자증(Oligoasthenoteratozoospermia·OAT)’이라고 한다. 이러한 환자들은 정자 형성과 성숙 과정 전반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정확한 원인을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연구진은 남성불임 환자 3명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WFS1 유전자의 양쪽 대립유전자에 병적 변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WFS1은 세포 내 단백질의 기능과 항상성 유지에 관여하는 유전자다. 이번 연구에서는 이 유전자가 정상적인 정자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새롭게 제시됐다.
유전자 제거했더니 정자 운동성 떨어지고 구조 이상 발생
연구진은 WFS1 유전자의 기능을 확인하기 위해 해당 유전자를 제거한 생쥐를 이용해 실험했다.
그 결과 수컷 생쥐에서 불임이 나타났으며, 정자 수와 운동성도 감소했다. 정자의 내부 구조에서도 여러 이상이 관찰됐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 중 하나는 정자 중간부에 위치한 미토콘드리아의 배열 이상이었다. 미토콘드리아는 정자가 움직이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세포 내 기관이다. 미토콘드리아의 구조가 정상적으로 형성되지 않으면 정자의 운동 기능이 저하될 수 있다.
정자 머리와 목을 연결하는 부위에서도 결함이 발견됐다. 이 연결부는 정자의 머리와 꼬리를 안정적으로 결합시키는 중요한 구조다.
난자와의 수정 과정에 관여하는 첨체(Acrosome)에서도 이상이 확인됐다. 첨체는 정자 머리 앞부분에 위치한 구조로, 정자가 난자를 둘러싼 층을 통과하는 데 필요한 효소 등을 포함하고 있다.
연구진은 이러한 구조적 결함이 정자의 운동성 저하와 수정 기능 이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자 형성에 필요한 단백질 보호 기능도 손상
이번 연구에서는 WFS1 유전자가 정자 형성에 관여하는 분자적 작용도 분석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WFS1 단백질은 PIAS4라는 단백질과 상호작용하면서 정자 형성에 필요한 여러 단백질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도록 돕는다.
이 과정에는 'SUMO화(SUMOylation)'라는 단백질 조절 작용이 관여한다. SUMO화는 특정 단백질에 작은 단백질을 결합시켜 기능과 안정성을 조절하는 과정이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WFS1이 SUN5, HSF5, CFAP74, IZUMO4 등 정자 형성과 관련된 단백질의 SUMO화를 촉진하고, 이들 단백질이 지나치게 분해되는 것을 억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WFS1 기능이 손상되면 이러한 보호 작용이 약해지면서 정자 형성에 필요한 단백질의 분해가 증가할 수 있다.
연구진은 이 같은 변화가 정자의 머리와 목, 미토콘드리아, 첨체 등 여러 구조에 복합적인 이상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일 것으로 분석했다.
정자가 만들어지는 감수분열 과정에서도 성염색체의 정상적인 접합이 방해받는 현상이 확인됐다.
원인 불명 남성불임, 유전자 검사로 진단할 가능성
이번 연구는 남성불임의 원인을 단순한 정액검사 수치가 아니라 유전자와 단백질 조절 과정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정자 수 감소와 운동성 저하, 형태 이상이 동시에 나타나는 남성에게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유전적 원인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다만 사람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환자 3명에 한정돼 있어 결과를 모든 남성불임 환자에게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WFS1 유전자 변이가 남성불임 환자에게 얼마나 자주 나타나는지, 변이 유형에 따라 정자 형성과 수정 능력에 어떤 차이가 발생하는지도 추가로 확인해야 한다.
또한 이번 연구만으로 WFS1 유전자 검사를 일반적인 남성불임 진단에 도입하거나 새로운 치료법으로 연결하기는 어렵다. 체외수정이나 미세수정의 임신·출산 성공률에 미치는 영향도 아직 충분히 규명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번 연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일부 남성불임 환자의 유전적 진단에 새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정자의 수와 운동성, 형태가 동시에 나빠지는 현상이 단순한 정자 품질 저하를 넘어 정자 형성에 필요한 단백질을 보호하는 유전적 체계의 이상과 관련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향후 더 많은 환자를 대상으로 한 유전자 분석과 기능 연구가 축적되면 남성불임의 원인 진단을 정밀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 2026년 10월 4일 국제학술지 ‘어드밴스드 사이언스(Advanced Science)’에 발표된 중국 쓰촨대학교 연구진의 논문 ‘WFS1 Deficiency Impairs PIAS4-Associated SUMOylation and Increases Ubiquitin-Mediated Spermatogenesis-Related Protein Degradation Leading to Testicular Male Infertility(WFS1 결핍이 PIAS4 관련 SUMO화를 저해하고 유비퀴틴 매개 정자 형성 관련 단백질 분해를 증가시켜 고환성 남성불임을 유발한다)’를 토대로 작성했습니다. DOI: 10.1002/advs.78060, PMID: 42829918.
